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면서 부족한 잠에 쫒겨왔던지라 어젯밤에 다음 날은 그야말로 실컷 자보자 하고 잤는데 8시쯤 되니까 눈이 저절로 떠졌다. 습관이란 무섭군 그래. 바깥을 바라보니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러고 보면 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면서 그렇게 큰 비를 안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일어나서 먼저 씻을까하고 화장실 쪽으로 가는데 사촌 동생도 눈을 말똥말똥하니 뜨고 나를 바라본다.


 

 어차피 일어난 김에 후딱 샤워를 하고 근처에 있는 약간은 허름한 중국 음식점으로 식사를 하러갔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뚝배기처럼 생긴 냄비에 새우와 오리 고기가 들어간 쫄면 비스무리한 면을, 사촌 동생은 오리 고기와 야채를 곁들인 미고랭(Mee Gorang: 면 볶음)을 시켰는데 솔직히 아침이라 그냥 끼니나 대충 때우자고 들어간 음식점이었건만 무척이나 맛있었다. 남은 국물까지 후르륵 다 마신 다음 호텔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사촌 동생은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다른 곳은 접어두고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센토사(Sentosa)섬이나 구경시켜줘야겠다 싶어 센토사로 들어가는 케이블카 역이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로 가기로 했다. 싱가포르에선 택시 값이 만만찮았기에 값이 싼 MRT(Metropolitan Rail Train의 약자로, 싱가포르의 지하철)를 타러 차이나타운 MRT 역으로 갔다. 자동판매기에 돈을 밀어 넣고 World Trade Center를 찾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 것이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노선도 앞에서 한참을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안내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 직원 왈,


하버 프론트 센터(Harbour Front Center)로 바꿨는데요.(물론 영어로...;;)”


 뭐야 헷갈리게시리... 에고,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이곳도 많이 바꿨구나... 헐...-_-;; 알고 보니 미국 쌍둥이 빌딩(이곳 역시 World Trade Center였다.) 폭파 사건 이후로 부정 탄다고 이름을 개명했다는 거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자판기에 돈을 밀어 넣고 표를 고르는데 두 정거장이니까 분명히 1.2S$라고 적혀있는데 나중에 2.2S$로 나오는 거다. 이거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단은 그걸 뽑아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종이 티켓이 아니라 꼭 우리나라 공중전화 카드를 3겹 정도 겹쳐놓은 두께의 플라스틱 카드다. 카드에는 싱가포르의 풍물도 그려져 있어 나름대로 예쁘다. 이거 만들려면 꽤나 돈 들였지 싶은데...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티켓을 기계에 넣는 게 아니라 갖다 대는 형식이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거 쓴 다음 기념으로 가져가면 어쩌지 싶었다. 싱가포르 정부로써는 엄청 손해일텐데하는 생각도 든다. 필자의 생각을 사촌 동생에게 말하니 맞장구치며 자기도 사실 이거 반납안하고 그냥 집에 들고 갈꺼란다..^^;;


 MRT 안으로 들어가니 깨끗하고 쾌적한 분위기다. 잠시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하버 프론트 센터 역이다. MRT에서 내려 카드를 띡, 하고 기계에 가져다대고 나가는데 밖에 카드를 회수하는 기계가 보인다. 사촌 동생은 정말로 카드를 가져갈 셈인 듯 보였으나 필자는 양심불량이 되기 싫었기에 카드를 회수기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쩔렁”, 이게 왠일인가! 1S$짜리 동전이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아, 그래서 아까 1.2S$였는데 2.2S$를 받았구나. 1S$는 말하자면 일종의 예치금이었던 셈이다. 어쩐지... 이렇게 하면 카드를 함부로 안 들고 가겠군. 결국 우리의 양심불량 사촌 동생도 주섬주섬 카드를 꺼내어 동전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MRT 역에서 하버 프론트 센터로 가려니 비가 그야말로 억수같이 쏟아진다. 이 정도라면 우산을 써도 휘어질 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 때문에 길도 하나도 안보이고... 한참을 고민하다 뒤쪽 길로 올라오니 육교가 하나 있고 그 쪽에

<- Harbour Front Center


...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육교 위에는 고맙게도 지붕까지 둘러져있었다. 그야말로, 만세만세 만만세다. 우히히...^^ 그 육교를 따라 꼬불꼬불 가다보니 어느새 하버 프론트 센터의 2층과 연결된 문이 나온다. 이 하버 프론트 센터는 과거(솔직히 그렇게 과거도 아니다. 내가 군대 가기 전이었으니...-_-;;;;)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라고 불렸던 곳으로 싱가포르 각 지역과 외국으로 가는 크루즈를 운행하는 크루즈 센터가 있는 곳이다. 물론 국제 무역에 관계된 상품 전시회도 자주 열린다. 건물 내에는 식당과 쇼핑몰 등이 100여 곳이 넘게 있으며 기네스 전시관도 있다고 한다. (근데 솔직히 여긴 안 가봤다....-_-;;;) 또한 우리가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인 센토사로 들어가는 페리와 케이블카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많은 여행사와 페리 터미널, 쇼핑 센터를 지나 1층으로 내려왔다. 먼저 환전소에서 말레이시아 달러(RM) 남은 걸 싱가포르 달러(S$)로 바꾸고 바로 옆에 있는 센토사 안내 및 접수 데스크로 갔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촌 동생이 자신의 짐을 많이(!) 부담스러워했다는데 있었다. 세상에, 여행 온다는 놈이 집에서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랑 등에 메는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왔었다. 인도네시아에 두고 가면 집까지 부쳐준다고 설득까지 했건만 결국 고집을 피워 여기까지 들고 온 것이다....-_-;;; 그런데 지금까지야 호텔에 맡기고 움직이면 됐었지만 오늘은 떠나는 마당이니 맡길 때도 마땅치 않았다. 혹시나 해서 센토사 안내원보고 섬 안이나 하버 프론트 센터 안에 짐 보관소가 있냐고 물으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급기야는 사촌 동생이


“비까지 오는데 이 짐을 들고 어떻게 다녀! 형은 옛날에 봤대매? 난 안 봐도 되니까 그냥 여기서 시간이나 때우다 집에 갈래.”


...하며 툴툴거리는 거다. 하마터면,


버럭! 이런 근성 없는 놈 같으니라고! 지금 나 좋자고 거기 가냐? 이래서 남자는 군엘 갔다 와야 돼. 이번에 입대해서 박박 기어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 꺼다!”


...라고 말할 뻔 했으나 곧 군에 끌려갈 불쌍한(?) 사촌에게 그런 말을 할 만큼 모질지 못했던 필자, 최대한 자애롭게(?) 웃으며(어쩌면 이빨이 살짝 드러났는지도 모르겠다...-_-;;;) “그래, 그럼 저기 스타벅스에서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알아보고 올게.”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그때부터 불쌍한 필자, 비를 맞아가며 하버 프론트 센터 내, 아까 그 MRT역 안, 인근 버스터미널, 하버 타워 등을 거의 한 시간가량 찾아 헤맸으나 결국 짐 보관소는 나타나질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스타벅스로 돌아가니 사촌동생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고 오히려 신경질이다.


이 자식이! 내가 누구 때문에... 벌억!


...할뻔 했으나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믿는 필자, 미소를 지으며


“아... 그래... 이 주변엔 아무리 찾아봐도 짐 보관소가 없더라.”


...라고 아주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어쩌면 마지막의 ‘없더라.’에서 이를 약간 갈았는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섬 안으로 들어가는 케이블카만이라도 한번 태워주자 싶어서 사촌 동생을 살살 꼬드겼다.


“짐 무거우니까 저 옆 하버 타워로 가서 그냥 케이블카 타고 들어갔다가 바로 나오자. 어차피 케이블 카 타는 동안에는 짐 들 필요 없잖아.”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사촌,

“그래, 형 말이 맞는 것 같다. 케이블카는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하고 의외로 순순히 따라온다. 히히... 단순한 녀석. 그러나 필자의 고단수 전략은 잠시 후로 미루고... 하버 프론트 센터 바로 옆에는 케이블카 역이 있는 하버 타워가 있었다. 1층에서 표를 끊고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15층까지 올라갔다. 15층은 케이블 카 역이 있는데 보통 Faber 산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들은 이 하버 타워를 지나 센토사 섬까지 들어가게 된다. 어쨌든 거기서 케이블카를 타려는데 갑자기


“우르릉, 쾅!”


...하며 천둥 번개가 치며 주위가 번쩍!, 한다. 사촌 동생이 사색이 되어 말한다.


“혀, 형... 이거 혹시 천국으로 가는 케이블카는 아니겠지”


 필자 역시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한다.


“천국에서 만나세....-_-;;;”

 우리는 케이블카에 올라탔고 잠시 후, 케이블카 역 안을 굴러가던 바퀴가 뜨며 케이블카가 덜컹하고 흔들리며 공중에 매달렸다. 곧이어 싱가포르의 전경과 항구에서 오고가는 배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비가 와서 흐릿하게 보였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다. 처음에는 그냥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자던 사촌 녀석이 신이 났는지 카메라 플래쉬를 이리저리 터뜨려대고 난리도 아니다...^^;; 결국 사촌 동생의 등쌀에 케이블카 안에서 한 장 찍어주긴 했으나 워낙 흔들려서 현상해보면 엉망이 되어 있으라라...ㅋㅋ 잠시 후 멀리서 머라이언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신기해하는 사촌. 필자가 싱가포르의 상징인 머라이언에 대해 설명해주는 동안 어느새 케이블카는 센토사 섬에 도착했다.(머라이언에 대한 설명은 싱가포르 편에서 읽어보시길...^^;;)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촌동생은 도로 돌아가는 케이블카에 올라타려고 했다. 이 자식이...-_-+ 그런 사촌을 또다시 살살 구슬렸다.


“이 건물만 나가면 Dragon Court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사진 찍으면 예술이래. 바로 앞이잖아...”


 

 그러자 이번에도 사촌은 넘어온다. 히히... 그래서 결국 우리는 Dragon Court로 갔다. 이곳은 센토사 섬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용모양의 분수로 용의 머리가 땅 속을 뚫고 올라온 형상이다.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기도 하고 분수대의 물을 끌어올려 거대한 입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비가 무지 왔건만 꿋꿋하게 우산을 쓰고 용 앞에서 한 컷. 다른 사람들이 ‘쟤네들은 사진 찍는데 미쳤나봐.’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또다시 사촌동생은 이제 돌아가잔다. 그러나 필자는 또다시 사촌을 구슬렸다.


“이 섬 안에는 무료로 운행하는 모노레일에 돌거든. 어차피 공짜고, 그거 타면 짐 가지고 걷지 않아도 되잖아. 거기 편안히 앉아서 섬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가자.”

...하고 꼬셨다. 그러자 또다시 넘어온다....ㅎㅎㅎ...
 
 
 
그러나 필자의 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결국 모노레일을 타고 섬 안을 돌면서 구경하다 다시 한번 사촌을 꼬드긴다.
 
“내가 아까 싱가포르의 상징이 뭐라고 했지?”
 
 그러자 사촌이 자신 있게 대답한다.
 
“머라이언!”
 
“딩동댕! 바로 다음 정거장이 머라이언을 배경으로 사진 찍으면 죽이는 Fountain Garden(분수 공원)이걸랑! 어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싱가포르의 상징과 사진 한판은 찍고 가야지.”
 
 어흠... 이거야 원... 완전히 눈깔사탕으로 애 꼬시기네...^^;; 그러나 결국 싱가포르의 상징과의 사진 한 판이란 말에 혹한 사촌, 얼른 내리잔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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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노레일에서 내려 파운테인 가든 쪽으로 갔다. 원래 그곳은 밤에 음악 분수 쇼가 벌어지는데 음악에 맞추어 형형색색의 빛을 받은 거대한 분수줄기들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물론 비도 오고 공연을 보기에는 사촌의 비행기 시간이 안 맞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분수대 바로 뒤쪽으로는 바로 싱가포르의 상징인 거대한 머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분수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뒤의 머라이언이 훌륭한 배경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사진 찍기 무척이나 좋은 장소다. 거기서 희희락락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린다.
 
“그러길래 내가 내일 오자고 했잖아!”
 
 웅? 누구지? 주위를 둘러보니 왠 한국인 부부와 아들이 서 있다. 우리가 장난기가 발동해 보란 듯이 한국말을 쓰며 그 옆을 지나가자 그 사람들도 반가웠던지 말을 건낸다.

“저기 사진 한 방 좀 부탁합시다.”
 
 반가웠다기보다 필요에 의한 거였군...-_-;;; 어쨌든 그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제는 돌아갔느냐, 아니다. 필자가 누구냐. 또 꼬드겼지...ㅋㅋㅋ

“모노레일 종점 가기 얼마 전에 Under Water World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안에 컨베이어 밸트가 설치되어있어서 걸을 필요가 없거든... 어때?”
 
 대답은? 물론 필자가 이겼지...^^V

 모노레일에서 내린 우리는 언더 워터 월드(Under Water World)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 이곳이 언더 워터 월드냐? 이곳은 일종의 거대한 수족관인데 투명한 아크릴 터널 아래를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지나면서 물고기들이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모습을 구경 할 수 있는 곳이다. 솔직히 이때까진 섬 안을 억지로(?) 끌고 다닌 감이 없지 않았는데 이곳에 오자 사촌이 좋아서 지가 더 난리다.
 
"우와! 저거 봐, 상어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 저게 오징어냐, 문어냐 왜 저리 크지?"
 
 
 오, 이 말이 정녕 군 입대를 앞둔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ㅋㅋ 하긴 입대 전에 여기에 왔던 필자의 반응도 사촌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부족하진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언더 워터 월드까지 구경한 우리는 다른 수많은 볼거리는 비와 시간 때문에 잠시 접어두고 케이블카를 타고 도로 하버 프론트 센터로 돌아왔다. 센터 내에는 페리 터미널도 있었기에 필자의 인도네시아 바탐 행 티켓도 거기서 바로 구입했다. 그러고도 1시간 조금 넘게 남아서 아까의 그 스타벅스로 가서 핫초코를 시켜놓고 사촌과 담소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가본;;; 스타벅스, 이젠 나도 된장남? -_-a)

 
“군대 가면 첫인상이 중요하거든... 처음에 잘 보이면 끝까지 잘 가는 거고, 처음에 밑 보이면 국물도 없다.”
 
 뭐 이런 얘기랄까...^^;; 얘기를 나누다보니 배 시간이 거의 다 되서 사촌을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도 열흘 가까이 함께 여행했는데 아쉽네... 눈물 찔끔...^^;; 짜식아, 군대 가서 항상 건강하고 적응 잘해라!

사촌을 바래다주고 내 배 시간도 빠듯했기에 페리 터미널로 냅다 뛰었다. 부랴부랴 출국 수속을 하고 바탐 행 WaverMaster 5에 올라탔다. 곧이어 배는 출렁거리며 싱가포르 항구를 벗어나고... 필자의 길고도 짧은 여정도 이제 막을 내렸다. 피곤함과 뿌듯함, 왠지 모를 아쉬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다. 배의 미묘한 출렁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서서히 뒤로 기댔다. Pin.

200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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